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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코니 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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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혜성 작성일05-05-03 00:00 조회6,97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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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읽어보지 않아 잘 모르겠습니다만 드라마에 관한 새로운 방법론이라 궁금하기도 합니다.
제가 미국학회가서 책의 저자인 코니 밀러의 쏘울드라마에 참여하였었는데...
글쎄요...코니 밀러의 드라마가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또, 저녁의 토론시간에도 이야기하였었지만, 천사의 등장이나, 일곱가지 차크라를 천사와 대입시켜 각각의 색천을 통과하는 장치라든지 하는 것들이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주인공의 내면과 연결이 잘 되지 않는다는 느낌으로 실망을 많이 하였었습니다. 그녀의 드라마가 다 그런 것은 물론 아니겠지만요...
 

>김세준님의 글입니다.
>
>인간을 영적인 존재로 간주하고 인간을 돕는 천사의 역할과 그 활동을 다이나믹하게 적용시키는 방법론을 적은 책으로 종교활동과 신앙인들에게 유용한 방법론이다
>
>
>
>작가의 말
>Connie Miller, MS, NCC, LPC
>
>개인적인 얘기 없이는 어떤 소개도 완벽할 수 없을 것 같군요. 저는 결코 작가가 되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사실, 단 한번도 작가가 되는 게 제 인생의 소망이 되었던 적이 없거든요. 그러므로 난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고 요구하지는 않아요, 그리고 나의 실수들에 대해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하지만, 내가 지금 여기 이 분야에 던져져 존재하고 있는 것은 기쁨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내가 발견한 과정에 함께 참여하게 되길 원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름하길 '영혼의 드라마(Souldrama)'라고 합니다. 이 새로운 싸이코드라마적인 과정은 몇 년간의 치료 끝에 이것에 열중해버린('stuck') 사람들을 위해 고안되었습니다. 종종 몇 년간의 치료 후에, 사람들은 자기 폭로의 위험으로 인한 고통과 일찍이 어린시절의 상처들로 우울했던 기간 만큼 진정으로 친밀한 관계를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나의 내담자들은 그들의 창조성과의 최종적인 관계 발견, 즉 그들 삶의 임무를 반영하는 그들의 영혼의 사명이라고도 하는 보다 높은 목적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 나의 가정에 기원을 두면, "일"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나의 아버지가 태피(taffy:설탕버터땅콩을 섞어서 만든 캔디)와 풍선 껌 그리고 사탕들을 일에서 돌아오실 때 가져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나의 아버지는 다양한 사탕 회사의 관리자 였기 때문이다. 어떤 오후들에는 그는 대학 강사로 일했다. 내가 5살쯤 되었을 때 나의 아버지는 떠나셨는데, 내가 언니와 함께 아버지를 찾아가면 우리들에게 사탕 회사 구경을 시켜주셨다, 일이란 내게는 즐겁고 재미난 것이었다. 내가 나이가 들자, 나의 어머니는 사회 복지사로 일하러 다니셨다. 그때는 일이란 자신 보다 덜 행복한 사람들을 돕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무언가 친절하고 자비로운 것이었다. 내가 14세 때까지 가졌던 모든 직업들은 내 삶의 목적을 위해 훈련하는 것들이었다. 어렸을 때, 난 나의 친척 아주머니께서 운영하시는 (사회적, 경제적으로) 혜택 받지 못한 아이들을 위한 여름 캠프에서 캠퍼(camper)이자 상담가로 일했다. 여기서 나는 관용을 배웠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갖은 나의 첫번째 직업은 (장애인)사회 복귀 상담사였다. 거기서 나의 창의성을 신체 장애자들이 그들의 신체적, 정신적인 한계 위에서 실제적인 일자리를 찾도록 돕는데 이용할 수 있었다. 
> 나의 영적인 스승들은 나의 부모님 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나에게 유머에 대한 감각과, 인내, 그리고 가르치는 능력을 가르쳐 주셨다. 그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와 어떻게 영적인 단계에서 관계 맺을 수 있는지 배웠다. 나의 어머니는 내가 앞으로 나아가갈 수 있는 존재, 진심으로 들을 수 있는 존재가 되도록 해 주셨다. 어머니께서 가르쳐 주신 매우 적은 몇 가지 규칙이 있는데, 아주 작은 지침으로 내가 매우 원했기 때문에 나는 항상 그렇게 해왔다. 나의 어머니는 항상 내가 옳은 것을 할거라고 믿으셨다. 그녀는 이혼으로 비롯된 그녀 자신만의 고통 때문에 정신적으로 내가 의지할 여유를 주기 어려웠다. 나는 '대학에 간다'는 한가지 규칙만 있었다. 거기엔 남자가 나를 떠날 경우에도 나는 나 자신을 돌볼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비록 내가 대학에 갔지만, 몇 번의 이혼으로 나는 그녀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 내가 자라면서 보지 못해 아쉬웠던 것은 남자와 여자 사이의 건강한 관계는 어떠한가 이다. 이것은 내 인생의 교훈이 되었다. 다른 많은 이혼자 자녀들처럼 내가 항상 느꼈던 것은 나의 부모님이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단지 아이들의 환상이 아니라, 어른으로써 내가 그들에게 얘기한 후 느꼈던 슬픔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첫사랑 인 나의 어머니와 결혼한 것이었는데, 결혼생활 중 다른 관계를 갖고 내 어머니에게서 떠났다. 이 관계는 내 아버지의 두 번째 결혼으로 이어졌다. 후에 지나고 나서, 그는 나의 어머니와 언니, 그리고 나를 떠난 것에 대해 후회하며 심한 죄책감을 느꼈다. 그의 아버지는 세 번의 결혼을 한 아버지의 아들이었다. 나의 증조부는 고아원에서 자라났는데 내 아버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엄격한 도덕적인 체계에서 자랐던 증조모 또한 그러할 수 없었다. 내 어머니는 아버지의 혼 외 관계 때문에 그를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그녀는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 밑에서 10남매의 중간으로 태어났는데, 그녀의 아버지는 오래간 지속적으로 외도를 했으며 아이들을 성적으로 학대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이를 받아들였지만 나의 어머니는 그러지 않은 것이다.
> 그들 모두의 자라온 환경들 때문에, 나의 부모님은 한번도 그들의 진실한 감정에 대해서, 어린 시절의 상처, 죄책감, 분노 그리고 수치심에 대해 대화하지 않았다. 두 분 모두는 그들의 이혼과 더 많이 대화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후회했다. 비록 두 분은 서로를 사랑했고 지금도 그러하지만, 바꾸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느끼셨다. 나의 아버지는 차례로 두 번의 이혼이 더 있었고, 나의 어머니는 한번의 재혼 끝에 미망인이 되었다. 난, 세 번의 이혼 후에 "바로잡기(get it right)"위해 노력했다. I kept making the man in my life my higher power as well as my career trying to "fix him"(?).
> 난 결국 깨달았다, 많은 치료와 싸이코드라마의 도움, 하나님과 여러 훌륭한 스승들을 통해 어린시절 상처로부터 나오는 에너지를 나의 높은 목적으로 재활용하고 변환하는 것을.
> 오늘날 난 이러한 부부들에게 커다란 동정심을 느낀다. 함께 살면서 여러 것들을 헤쳐 나가야 하는 이들, 그리고 이미 서로에게서 벗어났기 때문에 건강한 이혼이 필요한 이들 말이다. 이제 난 다른 이들이 바로 그렇게 해나가도록 도울 수 있다. 난 내가 자라날 때 지도가 필요했으며 아무도 내 말을 들어줄 수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아래에 놓여있는 메시지를 보면 그것들이 내게 큰 선물들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너는 자유롭게 누구는 될 수 있고 무엇이든 바랄 수 있다." 이다.
> 난 이제 깨달았다, 어떻게든지 우리는 우리 인생의 작가가 되어있음을.
>
>Connie Mil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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